한때 세계가 일본을 부러워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 일본은 기술과 제조업에서 독보적인 경쟁력을 갖추며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떠올랐고, 도쿄 거리는 번영의 상징처럼 빛났습니다. 도쿄의 땅값은 뉴욕 맨해튼을 앞질렀고, 일본의 은행들은 세계 최대 규모의 자산을 자랑하며 글로벌 금융의 거물로 떠올랐죠. 그야말로 ‘일본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그 눈부신 성장 뒤에는 보이지 않는 균열이 숨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성장’이라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과도한 신용과 투기가 만들어낸 ‘거품’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 찬란했던 일본 경제의 이면, 자산 버블이 어떻게 시작되고 왜 붕괴되었으며, 그 후 어떤 긴 그림자를 남겼는지를 차근차근 짚어보려 합니다.
1. 거품의 형성
플라자 합의와 초엔고의 시작
1985년, 뉴욕 플라자의 한 호텔에서 미국과 서독, 프랑스, 영국, 일본의 재무장관들이 모였습니다. 바로 ‘플라자 합의’였죠. 미국은 무역수지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달러 약세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 회의에서 각국은 공동으로 달러 가치를 떨어뜨리기로 합의했습니다. 결과는 즉각적이었고, 특히 엔화는 단기간에 50% 가까이 절상됩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엔화가 급격히 강세를 보이자 일본의 수출기업은 경쟁력을 잃고, 수출 주도형 성장 모델은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됩니다. 이를 상쇄하기 위해 일본 정부와 중앙은행은 ‘내수 확대’와 ‘완화적 통화정책’이라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되지요. 그런데 이 대응이, 의도치 않게 일본 자산시장에 거대한 불씨를 심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초저금리와 과잉유동성 정책
엔고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일본은행은 기준금리를 대폭 인하합니다. 1986년부터 1987년까지 불과 1년 반 사이에 기준금리는 5%에서 2.5%로 떨어졌습니다. 이렇게 낮아진 금리는 시중에 유례없는 유동성을 풀어놓게 되었고, 사람들은 그 자금을 들고 새로운 투자처를 찾아 나섭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돈이 실물경제로 흘러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제조업은 이미 엔고로 타격을 입고 있었고, 생산설비 투자도 포화 상태였습니다. 결국 자금은 ‘자산’으로 향했습니다. 그것도 가장 눈에 띄게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부동산과 주식으로요. 이때부터 일본은 본격적인 ‘유동성 기반 자산 버블’의 길로 들어섭니다.
정책당국은 이러한 흐름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제동을 걸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수를 부양하고 금융권을 진작시키기 위해 일부러 돈이 돌도록 유도했던 측면도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위험은 이미 예고되어 있었고, 모두가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당장은 괜찮다’는 안일함이 시장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주식과 부동산 시장의 광란
1989년, 일본은 그야말로 ‘버블의 정점’에 도달합니다. 도쿄증권거래소의 닛케이225 지수는 38,957포인트를 돌파했고, 이는 당시 일본 GDP의 3배에 달하는 규모였습니다. 기업의 실적과는 무관하게 주가는 치솟았고, 개인은 물론 법인, 금융기관까지 너나 할 것 없이 증시로 몰려들었습니다.
부동산은 더욱 심각했습니다. 도쿄 한복판의 땅값은 4년 만에 세 배 이상 뛰었고, 황궁의 토지 가치는 당시 미국 캘리포니아 주 전체와 맞먹는다는 주장까지 나왔습니다. 부동산은 투자처를 넘어 ‘신앙’의 대상이 되었고, 토지를 보유한 것만으로 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땅은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는 믿음은 강고했고, 그 믿음은 더 많은 자금을 시장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모든 현상이 ‘이성적으로 보였던 시대’였다는 겁니다. 당시 일본은 세계 최고의 기술력, 강한 제조업, 막대한 경상수지 흑자를 바탕으로 ‘경제 1위국’이라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산 가격이 오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고, 그 누구도 ‘거품’이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가능한 것처럼 보였던 시대, 사실 그 안엔 ‘무너질 이유’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던 것이지요.
2. 거품의 붕괴
일본은행의 급격한 금리 인상
1989년, 일본은행은 마침내 브레이크를 밟기 시작합니다. 자산 시장이 과열되었다는 판단 아래, 기준금리를 인상하기로 한 것이죠. 문제는 그 속도였습니다. 불과 1년 사이, 2.5%였던 금리는 6%까지 치솟았고, 시중의 유동성은 급속히 말라버렸습니다. 갑작스럽게 조여진 자금줄에 시장은 당황했고, 자산시장 전반은 혼란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사실 금리를 인상한다는 건 단순한 숫자 변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제부터는 다르다’는 신호이자, 투자자들에게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조심스러운 경고입니다. 그러나 그 경고가 갑작스러웠을 때, 시장은 이를 ‘위기’로 해석합니다. 실제로 부동산을 담보로 무리하게 대출을 일으킨 투자자들은 급격한 이자 상승에 버티지 못했고, 여기저기서 손절매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지요.
금리는 오르고, 거래는 줄고, 자산 가격은 하락세로 돌아섭니다. 언뜻 보면 단순한 조정처럼 보이지만, 이미 시장 내부에서는 ‘균열’이 시작되고 있었던 셈입니다. 붕괴는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자산 디플레이션과 금융기관의 붕괴
자산 가격이 하락한다는 건 단지 투자자의 수익이 줄어드는 문제가 아닙니다. 특히 그것이 ‘부동산’이라면, 더 심각한 사태가 벌어집니다. 왜냐하면 부동산은 단순한 자산이 아니라, ‘대출의 담보’이기 때문입니다. 담보의 가치가 떨어지면, 금융기관은 대출을 회수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추가적인 자산 매각이 일어나면서 다시 시장 가격을 끌어내립니다. 완벽한 악순환의 시작이지요.
일본의 지역금융기관과 제2금융권은 특히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이들 기관은 부동산 대출에 집중적으로 노출돼 있었고, 담보 가치가 무너지자 부실채권이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파산과 구조조정은 연쇄적으로 일어났고, 이 충격은 다시 기업 대출, 가계 신용으로 이어지며 실물경제를 조여들게 했습니다.
경제는 멈추기 시작했습니다. 자금이 돌지 않고, 투자도 위축되며, 소비자는 지갑을 닫았습니다. ‘디플레이션’이라는 단어가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습니다.
주가 폭락과 기업 가치 붕괴
부동산이 무너지면, 주식이 무너지지 않을 리 없습니다. 닛케이225 지수는 1989년 고점에서 불과 3년 만에 절반 이하로 추락했습니다. 대기업들의 시가총액은 폭락했고, 이익 전망은 암울해졌습니다. 더 심각한 건 ‘기업의 자산’이 줄어들면서 대출 상환 능력마저 흔들렸다는 점입니다.
당시 많은 기업들이 부동산을 담보로 차입을 일으켜 확장 경영에 나서고 있었습니다. 고정자산 가치가 상승하면 기업의 재무 상태는 좋아 보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더 많은 자금을 끌어다 외형을 키워나가는 구조였습니다. 그러나 자산 가치가 무너지고 나니, 그 구조는 모래성처럼 무너졌습니다.
도산, 구조조정, 매각, 합병. 시장에서는 날마다 위기 소식이 들려왔고, 기업들은 생존을 위해 조직을 쪼개고, 해외 자산을 팔며, 인력을 줄이는 극단적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한때 세계 최고라고 불렸던 일본의 기업들은 그렇게 조용히 무너져갔습니다.
붕괴는 갑작스럽게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다가오며, 끝내는 모든 것을 집어삼킵니다. 일본 경제는 그렇게 ‘단단해 보이던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3. 잃어버린 20년의 시작
디플레이션과 내수 침체
자산 버블이 붕괴된 뒤 찾아온 일본의 가장 큰 적은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오히려 ‘디플레이션’이었습니다. 가격이 오르지 않고 계속 떨어지는 현상은 언뜻 보면 소비자에게 유리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경제 전체를 얼어붙게 만드는 무서운 현상입니다. 사람들은 ‘내일 더 싸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비를 미루고, 기업은 ‘팔리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에 투자를 중단합니다.
그렇게 경제의 엔진인 ‘소비와 투자’가 동시에 꺼져버린 겁니다. 일본 가계는 자산 가격 하락에 따른 부의 역효과로 소비를 줄였고, 기업들은 구조조정과 유동성 위기를 겪으며 투자를 멈췄습니다. 사람들은 지갑을 닫았고, 기업은 문을 닫았습니다. 반복되는 침체와 회복 없는 저성장. 일본은 그렇게 ‘잃어버린 10년’, 그리고 ‘잃어버린 20년’이라는 낙인이 찍힌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좀비 기업과 생산성 하락
위기 상황에서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일본 정부는 금융 시스템 전체의 붕괴를 막기 위해 대규모 구제금융을 투입했고, 금융기관에는 자본을 확충시켜 파산을 방지하려 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살아난 기업들 중 다수가 이미 경쟁력을 상실한 상태였다는 점입니다.
이른바 ‘좀비기업’들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지요.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퇴출되었어야 할 기업들이 정부의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연명하면서 산업 전반의 효율성은 떨어졌습니다. 경쟁 없는 시장은 혁신도, 효율도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일본은 그렇게 ‘연명은 가능하지만, 살아 있다고 보기 힘든’ 경제 구조를 안고 가게 됩니다.
생산성은 정체되었고, 청년들은 안정된 일자리를 찾기 위해 ‘도전’보다 ‘보존’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기업은 리스크를 회피하고, 사회는 ‘변화보다 안정을’ 선택하면서 일본의 경제 동력은 서서히 식어갔습니다.
고령화와 인구 감소의 가속
여기에 더해진 것이 바로 ‘고령화’입니다.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사회에 진입했고, 이는 경제 구조 전반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젊은 세대는 줄어들고, 노동 가능 인구는 감소하며, 의료와 복지에 대한 지출은 늘어났습니다.
특히 버블 붕괴 직후 태어난 세대는 취업난과 경기침체를 경험하며 ‘소비보다는 저축’을, ‘결혼보다는 안정’을 선택하게 되었고, 이는 출산율 하락과 인구 감소라는 구조적 문제로 이어졌습니다. 고령화와 저출산이라는 두 축의 압박은 일본 경제의 허리를 더욱 조여왔고, 회복을 위한 여지를 더욱 좁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버블의 붕괴는 단순한 금융시장 쇼크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사회 전반의 가치관을 바꾸었고, 경제를 바라보는 태도를 바꾸었으며, 결국 한 나라의 성장 모델 자체를 송두리째 흔들어놓았습니다. 장기침체는 수치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남기는 법이지요.
4.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들
금융정책과 자산시장 간의 미묘한 균형
일본의 버블과 그 붕괴 과정을 보면, 하나의 명확한 진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통화정책은 단순한 숫자의 조정이 아니라, 시장의 기대와 심리를 움직이는 강력한 신호라는 점입니다. 일본은행은 과열된 시장에 뒤늦게 금리 인상을 단행했고, 그 결과는 자산시장의 급격한 붕괴였습니다. 만약 그 조치가 좀 더 일찍, 그리고 점진적으로 이뤄졌더라면 어땠을까요?
금리는 칼과도 같습니다. 자칫 잘못 다루면 경기를 베일 수도 있고, 너무 조심스럽게 다루면 거품을 키우는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따라서 정책당국은 자산 시장의 흐름을 민감하게 읽고, 시장 참여자들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로는 ‘말’이 ‘행동’보다 더 강력한 조정 수단이 될 수 있으니까요.
과도한 신용 확대의 위험성
자산 시장이 과열되는 데는 늘 공통된 배경이 있습니다. 바로 신용, 즉 ‘남의 돈’입니다. 레버리지를 활용한 투자는 상승기에는 수익을 몇 배로 증폭시키지만, 하락기에는 손실도 똑같이 증폭시킵니다. 일본의 부동산 시장은 대부분 담보대출에 의해 부풀려졌고, 자산 가격이 떨어지자 이 구조는 붕괴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신용을 통해 확장된 성장은 외부 충격에 극도로 취약합니다. 작은 금리 인상, 약간의 규제 변화, 또는 심리의 전환만으로도 시스템 전반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비단 일본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한국, 중국, 미국의 자산 시장 역시 신용 기반 위에 서 있습니다. 그만큼 더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버블 붕괴 이후의 '질적 전환' 필요성
거품은 언젠가 터지게 돼 있습니다. 중요한 건, 그 이후입니다. 일본은 버블이 붕괴된 후에도 산업 구조나 경제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했습니다. 과감한 구조조정은 미뤄졌고, 기술 혁신과 새로운 성장 산업으로의 전환은 더뎠습니다. 정치적 이해관계, 사회적 저항, 그리고 ‘잃어버린 세대’의 무기력함이 겹치면서 일본은 결국 장기침체의 수렁에 빠져들게 됩니다.
위기를 기회로 삼기 위해선 고통을 감수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구조조정은 아프고, 변화는 불확실하지만, 그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일본의 실패는 단지 버블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질적 전환’을 이뤄내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그 실패에서 배워야 합니다. 버블은 피할 수 없어도, 버블 이후를 어떻게 준비하느냐는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변화는 고통스럽지만, 정체는 더 위험합니다. 일본의 20년은 그 사실을 조용하지만 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맺음말
일본의 버블과 그 붕괴는 오래된 역사책 속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현실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부동산, 주식, 가상자산… 이름만 다를 뿐, 과열과 광풍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고, 많은 이들이 ‘이번엔 다르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장과 거품은 다릅니다. 거품은 본질 없이 부풀어 오른 기대이고, 성장은 실체 위에 쌓인 시간의 결과입니다.
'자산은 계속 오른다'는 신념은 언제나 가장 달콤한 유혹으로 다가오지만, 그 믿음이 확신으로 굳어질 때쯤이면 시장은 이미 무너질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일본은 그 믿음 속에서 찬란하게 빛났고, 그만큼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이 상승이, 과연 실체를 기반으로 한 것인지, 아니면 또 하나의 신화 위에 쌓인 모래성인지를 말이지요. 반면교사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일본이라는, 가까운 이웃의 지난 30년이 보여주는 가장 솔직한 경제 수업입니다. 우리는 그 교훈 위에 ‘거품이 아닌 본질’을 좇는 지혜를 쌓아야 합니다.
'경제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팬데믹이 만든 유동성 버블의 전모 (0) | 2025.03.30 |
---|---|
2008 글로벌 금융위기 해부 (0) | 2025.03.29 |
자산 버블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0) | 2025.03.27 |
외환시장의 작동 원리 - 글로벌 통화의 흐름을 읽는 법 (0) | 2025.03.26 |
변화하는 소비자의 마음, 소매 산업의 흐름 (0) | 2025.03.25 |